용현욱 강원동부보훈지청 보상과 
용현욱 강원동부보훈지청 보상과 

10살 쯤 무렵이였던 것 같다. 일제강점기 역사를 가르치시던 선생님께서 우리들에게 물었다. “그 시절의 우리들은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답했고, 선생님은 멋쩍게 웃으며 당신은 잘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는 그때, 선생님을 겁쟁이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1910년 8월 29일, 일본 제국에 의해 한일병합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후 우리 민족은 심적으로, 신체적으로도 감히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신음했다. 학교에서는 칼을 찬 교사를 보며 공포에 떨었으며, 길거리에서는 헌병들이 정식 재판 없이 반인륜적인 태형을 집행했다. ‘집행 중 수형자가 울부짖을 우려가 있을 때는 물로 적신 천으로 입을 막는다’[조선태형령(1912) 법규 일부 발췌] 그들의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민족은 소리없는 아우성에 몸부림쳐야만 했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는 박탈당했으며, 토지조사사업이라는 미명 아래 많은 농민들의 관습적 경작권, 입회권‧도지권들이 부정당했고 소작농으로 전락한 이들은, 자기가 나고 자란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긴 채 만주, 연해주 등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어업, 산림업, 은행, 광업, 소금, 인삼, 담배 등 우리나라의 경제 산업 전부를 침탈당했다.

이러한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전 민중이 거리로 나오게 되었는데, 바로‘3·1운동’이다. 1919년 3월 1일부터 수 개월에 걸쳐 한반도 전역과 세계 각지의 한인 밀집 지역에서 국민 다수가 자발적으로 봉기하여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일제의 한반도 강점에 대하여 저항권을 행사한 비폭력 시민 불복종 운동이자 한민족 최대 규모의 미증유한 독립운동이다.

참가자들은‘조선 독립 만세’라는 구호를 앞세워 일제의 무단통치를 거부하고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이는 민간과 지식인의 반향을 일으켜 대규모의 전국적 시위로 발전하였다. 시위가 끝난 뒤에도 그 열기는 꺼지지 않고 각종 후원회 및 시민단체의 결성, 김원봉‧윤세주의 의열단 등 무장 레지스탕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 등의 독립군들이 탄생하는 데 영향을 끼쳤으며, 무엇보다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차대한 의의가 있는 운동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우리나라 국가질서의 바탕이 되고 우리나라 사회의 최고의 가치체계인「대한민국 헌법」전문(前文) 시작 구절이다. 대한민국 헌법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으니, 그러한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계기가 된 이 3·1운동이 가지는 가치의 함의는 더이상 나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가 지금 한글을 사용할 수 있고, 조국을 대한민국이라 명명할 수 있고, 다른 나라의 정치 아래 인권유린을 당하지 않을 수 있는 이 자유는, 선천적으로 부여된 것이 아닌 우리 독립운동가 선조들의 고통의 피와 거룩한 땀들로 쟁취해낸 것이다.

영화‘박열’에는 독립유공자 가네코 후미코역을 맡은 배우가 일제로부터 대역죄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후, 이런 독백을 뱉는 장면이 있다. “나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면 그것이 비록 죽음을 향한 것이라도, 그것은 삶의 부정이 아니다. 긍정이다.”

다시 10살 쯤 무렵으로 돌아가보자. “그 시절의 우리는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그때 당시 선생님은‘겁쟁이’여서 그렇게 대답을 하신 것이 아니다. 선생님은 독립운동가들이 얼마나 외롭고 처절한 싸움을 이어갔는지,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겨운 하루하루를 감내해왔는지‘알았기’때문에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과연 우리는 순응했을까, 저항했을까. 그것이 어떤 모양이던, 지금 우리가 해야할 것은 명확해진다.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고, 그 분들의 행적에 감사하는 일일 것이다. 오늘만이라도 우리 선조들이‘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다 느끼셨을 고통을 헤아려보며, 그 분들의 공훈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보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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