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교수
최영교수

“인간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는 종교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다 못하고 죽는 7가지”는 철학적 질문이 된다.  철학적 질문은 종교적 질문에 앞선다. 철학적 질문이 완성되면 종교적 질문은 순조롭게 해결된다고 본다. 그래서 필자의 묵상에 잡힌 인간이 못하고 죽는 7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1. 자기를 모르고 죽는다. 인식론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는 “먼저 너 자신을 알라” (gnodi se auton)를 외치다 처형당했다. 희랍정권은 그가 청년들과 백성들에게 이방신을 믿게 하고 사회를 선동한 죄로 독배를 마시게 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의도는 “너 자신도 모르면서 어떻게 통치를 하는가?”하고 지도자의 본질적인 준비를 지적했다고 한다. 본질적인 준비란 인격, 품위, 정직, 참회, 진리와 같은 지도자조건의 선행이 되는 필수이다. 이런 것들이 없이  지도자가 되면 공익사회가 파괴되고, 호랑이와 사자가 날뛰는 사익공동체가 태어난다. 바로 그것이 죽이고 할퀴며 이권만 챙기는 한국의 국회이다. 자기를 아는 것은 자기를 예술적, 철학적, 윤리적으로 만들어가는 창조적 작품활동이다. 매일 일과와 생활 속에서 속사람을 바라보는 시간은 거의 없이 죽는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고행보다 깨우침을 앞세우고 있다.   

2. 자기 성격을 못 고치고 죽는다. 성격때문에 빈데 잡다가 초가삼간을 테우는 일이있고, 아이 씻은 물을 버리다가 아이까지 버린다. 이혼의 가장 큰 요인을 성격의 갈등으로 본다.인간의 성격은 태어나는가 만들어가는가? 보봐르와 쿠퍼는 여성과 인간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진다고 한다. 재창조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성격이 개같고 불같다”는 말이 있다.  성격이 나쁘면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만, 이보다도 자신을 죽이는 가해자가 된다. 성질이 나빠 화를 내면 몸에서 엔돌핀 대신 독극물이 나와 자신의 몸을 파괴한다. 그래서 피부가 빨리 늙게 되고 병들게 된다. 성격을 못고치는 것은 성격장애 때문이다. 성격을 못고치는 것은 가장 낮은 단계의 인격이다. 사람은 성격을 고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전문의와 정신치료를 해야 한다. 사도바울이 남긴 “나는 매일 죽노라”는 성격만들기에 답이 된다.                                                     

3. 자기개발을 다 못하고 죽는다. 미국은 전 국토의 5%만 개발된 나라로 알려져 있다. 사람도 죽기 전까지 대체로 5%정도 개발한다고 한다. 태어나는 은총에 비해 후천개발이 너무나 뒤지고 있다. Bill Bryson 작가는 “인간은 1매가톤 원자탄의 10배 이상의 힘을 갖고 있다”고 발표한다. 911테러를 보면 불과 5-6명이 미국의 거대한 쌍둥이빌딩을 붕괴시켰다. 이 거대한 힘을 어떻게 쓸것인가? 히틀러 한사람은 유대인 6백만명을 죽였고, 링컨 한사람은 흑인해방을 했고, 부다와 예수는 2천년이 넘게 지구를 돌리고 있다. 그래서 무너지는 지구와 교회를 살릴 수 있는 길이 보인다.                     

4. 욕심을 못버리고 죽는다. 사람이 죽을 때까지 끝까지 따라오는 것은 욕심같다. 절간의 스님들도 가장 힘든 것이 욕심버리기라고 한다. 고행을 하지만 욕심은 함께 동행한다. 욕심은 질기고 질긴 고무줄이다. 죽으면서 가져가지도 못하는 욕심은 죽음으면서 끝난다. 

5. 돈을 다 못쓰고 죽는다. 사람은 돈을 버는 재미, 모으는 재미, 그리고 쓰는 재미로 산다. 그중 제일 힘든 것은 쓰는 일이다. 제일 강한 힘은 모으는 일이다. 이 셋을 균형있게 잡으면 이상적이다. 그러나 가장 불행은 돈을 못쓰고 죽는 일이다. 그래서 전도서는 어리석은 부자는 모으기만 하고, 쓰지도 못하고, 고민만을 하다가 후자들을 싸우게 만든다고 했다. 흔히 은행에 있는 돈은 내돈이 아니라고 한다. 내가 벌었다고 해도 예수께서 정한 일용할 양식 외의 양식은 내것이 아니다.                                                                                     

6. 죽음을 모르고 죽는다.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재판을 내리는 것이 죽음이라고도 말한다. 죽음은 약 80세가 되면 보이는 것 같다. 이때 외로움과 불안이 나타난다. 실존철학은 종교에 맡기지 말고 주제를 세우고 부단한 삶의 투쟁을 가르친다.  왜냐하면 종교가 삶을 신께 맡기고 패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삶은 던져진 존재” (gevorfenheit) 라고, 까뮤는 삶에는 출구가 없으며 “noexit,” “자신이 창조적 주인이며,”  싸르트르는 시지푸스의 신화처럼 굴러내리는 돌을 끝없이 올리라고 웅변한다.  잡으러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매일 사랑과 정의를 위한 결전을 한다면 죽음은 바람처럼 스쳐갈 것이다.               

7. 선각자의 뜻을 모르고 죽는다. 예수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했고, 부다는 율법 같은 고행을 버리고 의지대로 살기를 선언했다. 그러나 인간은 선각자들을 연행하여 금관의 예수 (김지하)로 만들고 종교란 감옥에 가두고 말았다. 선각자들은 예배의 대상이 아니고 삶을 깨우는 예언자들이었다. 인류사에 가장 외로운 죽음을 맞이한 자 예수는 실존과 싸운 책임적 존재로서 삶의 표상이 된다. 독수리들이 모여드는 무덤에서 떠나  하녀들과 춤추는 부다와 세리와 창녀들과 술과 떡을 떼는 예수는 오직 광야에서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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