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교수
최영교수

필자의 사무실에는 “왔다가는 사람, 살다가는 사람”이란 표어가 창가에 세워져 있다. 오는 손님마다 읽고 그 의미를 느끼게 되는 글이다.  여러 구릅강의에서 삶에 대한 의미와 방향, 활역을 불어넣기 위해 읽혀지기도 한다.

다시 설명을 한다면 “왔다가는 사람”은 모태에서 태어나 부모와 사회공동체의 도움을 받으면서 본능적 욕망과 소유를 향해 개미처럼 밤낮 일하다가 죽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사람은 수신재가를 하면서 국가와 사회에 의무를 다하며, 공헌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또한 homeless에서는 벗어날 수 있는 능력가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기에는 위험성이 기다린다. 욕망과 소유를 향한 질주는 물질을 개발하는데는 자본주의적 성공모델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생 2막에서 무의미하고 무감각과 무책임이란 3무병에 떨어질 수 있다. 돈도 있고 시간도 있으나 노가 없는 배처럼 표류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한편, “살다가는 사람”은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것인가?” 등을 놓고 늘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자기를 계발하며 만들어 가면서  자신과 사회변혁을 위한 주제와 프로그램을 만들고 거기에 최선을 다한다. 베이컨이 말한 거미와 개미 중에 벌에 속하며, 또한 꽃을 생성시키는 나비와 같은 존재라고 비교할 수 있다. 거미가 사회악의 대표라면 개미는 소유, 벌은 존재의 가치에 초점을 두는 대표라고  분류할 수 있다. 

소유형이 이기적인 사람을 만든다면, 존재는 공익동체 (gemeinschaft)를 위한 타자지향 형을 만들어내게 된다. 그래서 가난, 질병, 사회붕괴, 그리고 지구위기에 대해 늘 고민하고 해법을 만들어내면서 행동자가 되게 된다. 이념과 교리가 아니고, 사랑과 정의가 행동의 근원이 된다.  

이와 관련해서 Eric Fromm의 ‘소유와 존재’는 “소유 없는 존재와 존재 없는 소유”를 논쟁하게 한다. 자본주위가 존재를 잊게 한다면, 공산주의는 소유를 망각하게 된다. 그래서 미국의 작가 Marine Williams는 “물질 없는 영혼은 불편하지만, 영혼 없는 물질은 위험하다.” 고 웅변한다. 지금 두 전쟁에서 러시아와 이스라엘은 영혼을 잊었고, 가자와 우크라이나는 물질과 기술의 빈곤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의 부정부패는 영혼 없는 물질로 규정할 수 있으며, 북한은 물질과 영혼 둘 다가 빈곤한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한 사람이 죽기 전 유언으로 “내가 죽으면 내 모든 돈을 관에 넣어 주라고 했다.” 장례식에서 주례목사는 은행의 돈을 수표로 써서 넣다고 한다. 왔다가는 사람은 죽으면서도 돈을 갖고갈 것으로 거대한 착각을 한다. 그래서 부다는 “무소유의 힘”을 갖게 했고, 예수는 “일용할 양식”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해마다 성탄과 새해가 되면 온 세상이 떠들썩해 진다. 샤핑과 선물사기, 파티, 인사 등으로 백화점과 거리를 헤매다가 지쳐버리기도 한다. 여기에 소유는 가득하지만 존재는 잃어버릴 수가 있다. 커피 한잔 앞에서 니체의 글을 감상하는 것도 새해에 존재가치를 찾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정박하지도 말라, 표류하지도 말라. 오직 항해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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