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영 교수, 정직한사회만들기
최 영 교수, 정직한사회만들기

데카르트(1596-1650)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sito ergo sum)란 말을 남긴 합리주의 철학가이다. 몸이 연약해 일생을 침대에 누워 수학철학을 정립했다고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사유하는 기능은 존재의 가치를 들어낸다"고 강조한다. 생각에 기초한 합리주의 이전에 인간은 스스로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자연의 힘과 신에게 예속되어 살아왔다.

인간의 존재가 제대로 서려면 '생각'과 '회의'가 열쇠라고 한다. 모든 일에 회의적이어야 하고, 그 회의에 또 회의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생각하는 존재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데카르트의 회의와 생각의 작용에서 근대과학이 태어난 원천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는 데카르트에 이어 '고민' (agony)이란 단어를 놓고 고민한다. 생각은 yes와 no를 놓고 가리지만, 고민은 근심과 걱정 속에 도덕과 책임문제 그리고 양심과 영성의 문제를 포함해서 심히 고통스러워 하는 단어다. 모든 인류의 성인들과 철학적인 사람들은 고민의 주인공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고민에 빠져 한참 길에 서 있다가 구경거리가 되었고, 부다는 생노병사에 고민 끝에 화려한 궁전을 떠났고, 노자는 대결보다 자연과 상생의 길을 걸었다.

예수는 인류사에 가장 처절한 고민의 모습을 감람산에서 보였고, 제자들은 도망치며 모멸감을 남겼다. 그리고 죽음의 잔을 옮겨달라는 절규에 하나님의 침묵과 십자가로 끝이 났다. 그러나 저들의 고민은 문제를 풀어내는 책임적인 행동을 하게 하는 해답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고통스러운 실존적인 삶 속에서 "고민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란 말을 선언하다.    

이제 고민해 볼 때가 왔다. 왜 '고민'해야 하는가? 한국사회는 심각한 고민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에 어린아이 둘을 차례로 냉장고에 넣어서 죽인 일, 신생아를 쓰레기 통에 버린 일, GS건설 아파트 건축의 보강철대 부실공사로 붕괴된 일에 대해 고민해 보자. 이 세 종류는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한 괴물이야기들이다. 이와 같은 끔직한 사건은 재앙이다. 이 사건은 단순히 두 젊은 가정의 미숙함이 아니며, 한국인 우리 모두에게 병리적인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가난했어도 이 전에 신생아를 죽였다는 일은 없었다. 부실공사로 이익을 챙기고 손실게임을 하는 것은 도처에 만연되고 있다. 이 사건들은 5천만 동포와 연관이 있으며, 한국사회와 나와 연관이 있는 사건들이다. 짐승들도 새끼를 죽이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사유의 기능 때문에 인간은 짐승보다 우월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한국사회 짐승이 앞서고 있는 것은 아닌가? 누구든 새끼를 죽인 사람은 괴물이다.  

데카르트의 "생각과 회의"의 작용이 근대과학을 탄생했듯이 우리가 고민한다면 한국사회에 변혁이 올 것으로 믿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친구들과 커피집에서 고민해보자. 국가공직자와 국회의원들 그리고 일터에서 고민해 보자. 가정과 학교에서 문제와 해법을 토론하자. 법당에서 염불과 교회에서 예배만 드리고 돌아오지 말고 심각한 토론시간을 만들자. 예방과 근본적인 해법을 토론하며, 그리고 좋은 아이디어는 스스로 실천하고 정부에 건의하자. 모두가 침묵하면 할수록 사회는 더 망가지게 될 것이다.

윤석열정부에 바란다. 출산보호정책을 더 깊게 연구하고, 양육권을 포기하는 행동은 차후 세금을 내는 책임감을 갖게 하자. 둘째, 정부는 지금이라도 비극적인 신생아들의 죽음에 대해 조의를 표하고 정부와 국민 모두가 조기를 달길 바란다. 미국이나 선진국에서 비극적인 죽음에 조기를 걸듯이...

이제 모두가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고민할 때가 왔다. 이 시대를 놓고 고민하지 않는다면 사람됨을 포기하고 무의식의 코마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괴물적인 사람들은 늘어날 것이다. 본훼퍼는 그의 윤리학에서 "예수는 누구인가?"란 질문에 "Stand for others"란 말로 응답했다. 책임적인 윤리가 없는 삶에는 구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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