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교수, T-Leadership School 
최영교수, T-Leadership School 

"나무는 사람이 없어도 산다."는 말을 한다면 인간창조 전의 자연시대를 상상한다. 그러나 "사람은 나무가 없이는 못산다."는 말은 환경운동을 생각하게 한다. 필자가 이런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나무'를 당신이란 상징인 인격체로 묵상해 보자는 것이다. 왜냐면 밤낮 언제나 창문을 열면 나무는 말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말이 없어도 말하는 것 같고, 친구처럼 이웃처럼 정신적 동행자로 느껴진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나무가 없는 인간존재가 불가능 하다면 "인간이 '너' 없이 존재가 가능할까?" 새삼 느껴진다. 나무를 보고도 당연히 서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 나무의 가치는 무의미하다. 그러나 나무를 보고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그 가치는 큰 양분이 될 것이다. 이처럼 가까이 멀리 가로와 세로로 만나는 가족과 친구, 그리고 이웃은 소중한 존재가 아닐까?  한편 "나무는 사람이 없어도 산다."를 문자적으로 읽으면 너 없이도 살 수 있다는 단절과 이기적인 생각이다.      

나무를 당신으로 보면서 Martin Buber가 생각난다. 그는 I and Thou의 저자로 유명하다. 그는 두개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I and Thou, 대화의 관계와 I and It, 독백의 관계를 그리면서 내가 너를 인격체 혹은 신으로 보지 않고 물건, 상품의 대상으로 보았을 때는 비인간화나 이권공동체만이 존재하게 된다. 히틀러 이후 일본 제국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오늘의 푸틴의 폭력도 이런 I and It의 맥락에 연결되었다고 본다. I and It의 관계는 무서운 사회악과 폭력을 연출한다. 오늘 한국사회에는 어두운 그늘이 내리고 있다. 가족과 가족의 증오살인 그리고 자기가 낳은 자식을 버리고 죽이는 일은 I=It의 관계를 넘어서고 있다.           

필자가 '너'란 인간의 가치가 소중함을 웅변하는 것은 인생 2막에서 들려오는 소리 때문이다. 소유와 경쟁이란 터널에서는 듣지 못했다. 이제 인생 1막의 터널에서 벗어나니 들리기 시작한다. 내가 I에 초점을 맞추면 내가 물건 It로 변하는 것 같으며, 너를 It로 초점을 맞추면 내가 한없이 졸열하고 추해 지는 것 같다.                

인간의 삶의 여정은 인간화를 향한 진화의 과정이라고 본다. 12억 년 전 모든 지구의 미생물과 함께 출발한 인간은 7억 년 전에 호모사피언으로 결정된 후 지금도 진화해야 한다. 왜냐면 선과 악이란 국경에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 너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선언을 할때까지 진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 없이는 무의미하다."고 선언할 때까지 진화해야 한다.                                  

필자는 최근 미국 위스칸신 주의 Beaver Dam YMCA와 집 앞의 교회를 비교해 보았다. 두 공동체가 화려한 건물을 갖고 있으나 교회는 일주에 단 한 번 열리고 YMCA는 매일 열린다. 교회의 모습은 죽어가는 것 같고, YMCA는 살아있는 공동체로 생동감이 넘친다. "지구상에 약 2억의 기독교인이 문명을 선도하던 자리에 YMCA가 대치되지 않을까?"하고 고민해 본다. YMCA, 사람과 친구가 모이고, 지덕체를 향상하며, 눈만 뜨면 언제나 가고 싶은 열린 공동체로 자리잡고 있다. 거기에 사람들은 모두가 내 앞에 서 있는 나무들이다.

그래서 필자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너가 존재 함으로써 내가 존재한다. (You exist, therefore, I ex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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