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재 복 선임기자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이는 1919년 3월 1일, 전 국민이 들었을 독립선언문의 시작 글이다.

‘이러한 우리의 독립선언에 대한 의지를 세계만방에 고함으로써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자손만대에 고함으로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한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그 날 우리 모두의 손에는 태극기가 들렸고 목소리는 하나 되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100여년이 흐른 오늘 우리는 태극기를 들었고 만세를 외쳤지만 기개 높이 외쳤던 인류평등과 민족자존의 정권 영유는 어디로 간 것일까.

2017년 삼일절 우리 선배들이 광장에서 들은 태극기는 100년 전 독립선언에 담겼던 인권·세계평화·민주주의 등에 대한 철학이 아니라 오직 일 개인의 안위만 묻는 도구로 전락했다.

선조들이 목숨 걸고 지켜온 태극기는 국가를 농단하고 국민을 편 갈라놓은 사실조차 외면하고 부인하며 몸부림치는 대통령만을 위한 한낱 보호 장구에 불과했다.

태극기는 지나온 역사를 간직한 개인과 국가의 정체성이며 대한민국의 꿈을 담고 있는 미래진행형이다. 그렇기에 2017년 광장의 태극기는 전체를 대표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 그 광장의 태극기는 삼일절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집 앞에 게양하려는 사람들에게까지 불편함을 주는 애물단지로 변했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100년 전 우리 선조들이 가슴에 돋는 칼로 새기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독립선언문을 만든 것은 민족 모두가 한 마음으로 뭉쳐 독립국가로서의 자긍심을 높이고 인류평등에 이바지하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 현실은 적 아니면 동지만이 존재하는 반쪽 세상이 되었다. 가장 즐겁고 편안해야 할 가정, 가족조차 촛불과 태극기, 탄핵찬성과 기각의 이분법으로 나뉘어져 있다. 세대 간의 간극을 더 넓혀 놓았고 함께 TV라도 볼라치면 살얼음을 걷는 아슬아슬함과 갈등은 더 깊어지고 있다.

우리 선배들이 오늘 광장에서 들은 태극기는 자신들이 몸 바쳐 산업화로 일구어 낸 대한민국이 자칫 흔들리고 망가질 수 있다는 노파심의 발로일 수도 있다. 그것까지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 우려가 박근혜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우리는 단호히 거부할 것이다. 국민통합의 철학대신 태극기 선배들 뒤에 숨어 국정농단 의혹도 모자라 국민을 편 가르고 가족들마저 적과 동지라는 이분법의 대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대다수 성실한 국민의 편에 서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고 표현의 자유보다는 히틀러 식 줄 세우기를 지시하고 조정했으며 우리 편이 아니면 빨갱이의 잣대를 수시로 들이 댔다.

그리고 국정운영의 한 부분이었다고 강변한다. 그것이 자신에게 충성하는 15%의 사람들과 바른 말을 제 때, 제대로 하지 못하는 간신들을 위한 정책이었음에도.

100년 전 그 날 읽었던 독립선언문에 ‘新天地(신천지)가 眼前(안전)에 展開(전개)되도다. 威力(위력)의 時代(시대)가 去(거)하고 道義(도의)의 時代(시대)가 來(내) 하도다’고 분명히 써 있다.

그 숭고하고 진실 된 마음이 전해져 일제의 서슬 퍼런 총칼에도 불구하고 두려움 없이 태극기를 든 것이다. 태극기는 진실 되고 숭고한 백성들의 진정어린 자기표현이었고 자기희생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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